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 주장 사건 (문단 편집) ==== 일본의 낙랑군 중국인 지배층설은 고고학으로 깨졌다 ==== 한국의 [[광복]] 이후 일본학자들은 더 이상 직접 유적에 참여할 수 없으니 기존 고고자료 보고서로 연구를 하였다. 그 양반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렇다. ||지배층||중국인(한족)|| || 피지배층|| 고조선계(토착민)|| 이런 주장을 집대성한 양반이 미카미 쓰기오다. 마키마 쓰기오는 낙랑군의 지배계층은 중국인(한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고인돌이 고조선계 토착 유력자들의 무덤이라고 주장했다. 토착민들이 후진스런 문화양상이였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미카미 쓰기오의 주장은 [[식민사관]]에 영향 받은 것이다. >중국 사료에서 앙굉 왕조에 대한 기록과 낙랑구역 귀틀무덤 목간 출토 고고학을 통해 살펴보면 당시 낙랑군엔 고조선계 토착호족 왕씨와 중국계 호족 왕씨가 병립했는데, 신제국 말기에 토호 왕조가 반란했다가 중국계 호족 왕굉에게 진압당해 지배계급이 바뀐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변한 구야한국이 낙랑군에 철덩어리들을 갖다바쳤단 기록으로 봐도 알 수 있듯 낙랑군은 조선 지역에 설치되어 조선은 물론 삼한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는 식민지 역할을 충분히 했다. [[식민사관]] 학자들이 '낙랑군 내 고조선계 토착민 무덤'이라 주장했던 고인돌에 대해 이후 고고학 연구가 이뤄졌다. 지속해서 한 발굴조사에 따르면 이것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까지만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낙랑군이 기원전 2세기 말(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걸 보면 이건 낙랑군 시기 무덤일 수 없다. 또한 해방 후 북한 지역에서는 고고자료를 꾸준히 발굴해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낙랑 고분들이 약 3천여 기 발굴됐다. 그러다 낙랑군의 지배층이 조영했을 무덤들에는, 식민사관과 완전 다른 유물들이 나왔다. '''세형동검(한국식동검)이 발견됐다.''' 세형동검은 고조선계 토착민의 문화다. 토착민 전유물이 '''낙랑군 지배층의 무덤에서 다수 출토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지역에 오래 산 토착민이 낙랑군의 유력자였던 것이다. 이것에 따라 이 무덤들에 함께 묻힌 중국제 수입 물품들의 정체도 밝혀졌는데 외국 수입품이었던 것이다. 지배층이 중국 사람이라 묻힌 게 아니라 외국 수입품을 같이 묻어둔 것이다. 거기다 고조선계 토착민이 낙랑군의 주요 관리를 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초원 4년 호구부(낙랑군의 호구조사 공문서)가 한 무덤(정백동 364호)에서 발견된 적이 있는데 이 무덤에서 세형동검 계통 유물이 발견됐다. 고조선 계통의 토착민이었다. 거기다 낙랑군의 25현 가운데 하나인 부조현의 현장((夫租長)을 지냈던 고상현 무덤에서도 세형동검이 발견됐다. 이렇게 무덤에서 나타난 토착 문화에 연구에 따라 낙랑군 지배층의 상당수가 고조선계 토착민인 것으로 밝혀졌다.[* 안정준, 오늘날의 낙랑군(樂浪郡) 연구 2 [[http://www.ikaa.or.kr/webzine/read.php?pid=8&id=48&PHPSESSID=27b3468aad48569b098d5553ece57ce4|#]] ] 거기다 낙랑군이 있을 때 고조선 사회가 그대로 유지됐다는 게 밝혀졌다. >또한 중국 한대(漢代)의 군현들은 각 현들이 대략 1만호 정도의 호구수를 기준으로 고르게 나타나는 반면에, 낙랑군의 경우 25현의 각 현별 호구수가 극심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조선현: 9678호, 점제현:1039호, 제해현: 173호(초원 4년 호구부 기준)]. 이 역시 연구자들에 의해 그 원인이 밝혀졌다. 낙랑군의 25현은 중국 왕조의 다른 군현들처럼 호구수(1만호 기준)에 따라 획일적으로 구획된 것이 아니라, 종래 토착세력들의 영역과 경계를 따라서 구획된 것이다. 즉 한나라는 고조선 시기 이래의 토착세력들이 원래 거주했던 지역과 사회 구성 형태를 깨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인정해주었고, 그 과정에서 현의 규모가 아래와 같이 불규칙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낙랑군의 설치 당시에도 엄연히 유지되었던 고조선계 토착민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 >요컨대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그 지역의 토착세력들은 흩어지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중국왕조는 다수의 토착민 사회가 온존한 옛고조선 지역에서 이들의 협력과 도움 없이는 군현의 장기적인 운영이 불가능하였다. 이로 인해 낙랑군의 주요 지배층 가운데 상당수는 토착민으로 구성되었으며, 낙랑군의 지배층 유적은 고조선계 세형동검 문화의 기반 위에 중국 문물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 >이처럼 고고자료를 기반으로 한 한국학계의 연구로 인해 낙랑군이 중국인에 의해 운영된 중국인 사회라는 오랜 통념은 깨졌다. 이와 더불어 지배층은 중국인이요, 피지배층은 토착민이라는 일본학계의 이원적 종족지배론도 함께 붕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 군현이라는 외형과 그 지역에 파견된 일부 중국인 관리들의 존재만으로, 낙랑군을 (근대 제국주의적 수탈)식민지 개념으로 이해하고, 심지어 근대 이후의 민족적 자긍심이나 영토 관념(귀속 여부 등)을 투영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안정준, 오늘날의 낙랑군(樂浪郡) 연구 2[[http://www.ikaa.or.kr/webzine/read.php?pid=8&id=48&PHPSESSID=27b3468aad48569b098d5553ece57ce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